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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이오만이 살길이다-물질, 마음의 출발점
작성자 Bio-CORNA (ip:)
  • 작성일 2015-01-28 12: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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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만이 살길이다_물질, 마음의 출발점

 

 

물질.

우리들은 언어적 습관에 의해 '물질은 생명적이지 않다'고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물질에도 생명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 수긍하지 않는다. 물질은 생명적이지 않은, 그저 죽어있는 것쯤으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과연 그럴까?

 

옛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곧 그들의 믿음이 되었고 신앙이 되었다.

샤머니즘이 바로 그것이다. 정령이란 어떠한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하며, 인격체로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격체로까지 숭앙하게 되면 비로소 신앙으로 발전, 인간의 생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 요소로 작용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유일신을 강조하는 서양종교가 득세를 하면서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옛사람들의 그같은 생활방식을 미신이라 치부하며, 심지어는 경멸하기 까지도 했다. 그러한 까닭에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생활방식들은 우리들 기억속에서 하나둘씩 지워지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우리들의 이같은 인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양자물리학이 밝혀주고 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잘개 부수어 그것을 구성하는 최소단위까지 쪼개어 보았다. 그리고는 결론 짓기를 물질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 '무엇'으로 결론 지었다. 그리고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양자를 발견했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미립자들은 움직인다는 뜻이고, 이들이 모이고 모여 물질을 구성했으니 물질은 궁극적으로 생명적인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니 세상만물에 나름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온 우리의 옛 선조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그것을 인격화하거나 신격화해 숭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들로부터 설득력을 잃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양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인 나(我)가 있어야 한단다. 조건의 학문이 과학이니, 이는 중요한 조건이다.

 

물론 최첨단이기도하며,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물리학 교재(?)인 반야심경에서는 이미 이같은 이론들을 논리정연하게 설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이미 밝혀 놓았듯 물질이란 에너지와 정보의 결합에 의해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지 않고 형상을 잃은 채로 있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空)이라고 해서 그냥 비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함이 아니다. 다만 형상을 갖출만한 계기(인연)가 없었을 뿐 에너지와 정보의 형태, 즉 필드의 형태로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물질을 가장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energy)+정보(information)란 것을 인식해야 한다. 물질의 범주에는 글을 쓰는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포함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나를 구성하려는 정보와 에너지들의 결합체가 바로 육신과 마음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보와 에너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떠한 형태로 변화를 해나갈까?

그것은 인류의 최대 화두인 셈이다. 나라는 육신과 그 육신을 움직이는 나라는 마음덩어리는 어떠한 에너지와 정보체일까?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 우주는 한치의 틈도 없이 에너지와 정보로 가득차 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는데 우리의 인식기관이라는 게 얼마나 불완전한 것들인가. 인식 수단인 여섯개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들이 감지해내는 범위는 아주 한정적이다. 그러니 그같은 인식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기반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온 우주를 섭렵할 수 없는 어떠한 한계에 둘러쳐져 있는 것일 게다. 인식기관의 한계가 곧 마음의 한계인 것이다.

 

우리들 인식기관 중 가장 많은 정보를 주고 받는 기관은 바로 안식(眼識)이다. 안식(眼識)이야 말로 생존에 따른 대다수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교감하는 인식기관이다. 이는 우리들이 '빛의 존재'란 의미다. 안식은 빛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이야기한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정보의 성격이 대부분 빛으로 구성돼 있다는 말과도 같다.

 

사실 양자물리학에서도 물질을 쪼개도 또 쪼개다 보면, 미립자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고 그런 후엔 물질의 존재가 빛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의 존재는 태양보다 밝은 광명의 덩어리란 셈이다. 우주를 밝히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빛의 존재이다.

 

우리들 각자가 빛의 정보로 구성돼 있는 광명의 화현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어둡고 음울한 관념에 사로잡혀있고, 삶과 죽음이란 관념에 갖히어 암흑의 육도윤회를 달가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두는 각자가 한계를 두고 지어둔 마음이란 벽에 갖혀 있어 자신이 갖고 있는 광명의 밝음을 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각 개체마다 설정돼 있는 마음의 한계는 개개인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눈빛에서 발산되는 정보는 어쩌면 생명개체가 본원적으로 갖고 있는 빛의 정보를 가장 잘 갈무리하고 있는 인식기관이 아닐까 싶다. 초롱초롱 빛나는 어린아이의 눈빛이 하나 같이 순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이마다 그 눈빛이 발현하는 정보가 다름을 아는 이가 드물다.

 

  


 

 

 

 

굳이 예를 든다면 사람의 마음이 변절됐을 경우 가장 먼저 나타나는 표상이 눈빛의 변화와 낯빛의 변화다. 눈이 그사람의 전체를 나타낸다는 것은 상학(相學)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상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신기원 선생께서도 "눈이 모든 것을 나타내준다"며 눈에서 그사람의 얼을 읽을 수 있다고 강조한단다.

 

마음.

그것은 우리의 인식기관이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아닐까 싶다. 

우주를 밝히고도 남음이 있는 광명의 존재를 꽁꽁 묶어둘 수 있는 윤회전생을 통해 축적된 전자기학습정보인 업력(業力)과 어울려 허상의 세상을 펼쳐놓는 허망한 꼭두가 아닐까 싶다. 우리 인간은 물질이면서 그것을 조종하는 마음이란 정보체계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마음의 모양은 또 어떠할까?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이 마음이다. 천변만화의 능력을 가진 마음, 그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나 정말로 보고 싶고, 만저 보고 싶을 것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생각을 조금만 하는 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법하다.

 

필자는 가끔 마음의 근원을 찾아 내면 세계에 깊이 침잠해 쫓아 들어가 보려고 애를 쓴다. 마음의 꼬리를 잡고 깊이 들여다 보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경계에 이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을 잡아볼 도리가 없다. 뭔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이 마음의 뿌리이다. 결국에는 허탈하게 빈손으로 되돌아 나올 수 밖에 없다. 본연의 마음, 그것을 쫓아 그 모습을 보려 하면 할 수록 아득해진다.

 

마음을 쫓는 날들이 더해 갈수록 더 아련해진다.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제 마음을 더 이상 쫓아가지 않으리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몸과 얼굴이 바로 마음이며, 마음이 만들어낸 형상이고, 내면의 나인 것이다. 더이상 내면의 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포 하나 하나가 개체인 나이며, 그 나들이 모여 커다란 나의 모습을 나타낼 뿐이 아닌가 싶다.

 

마음.

필자가 마음에 대해 언급을 하는 까닭에는 지금까지 말해온 마음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100프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이 날때마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을 정리해 끄적여 둔다. 자꾸 끄적이다 보면 나름의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에 차오는 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욕심(?)에서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

 

우리의 마음은 사실 우리 몸이 갖고 있는 눈,,,,,,의식 등 여섯 개의 인식기관이 외부 생존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토대로 순간순간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는 정보를 만들어 방출하는 통합된 정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통합된 정보의 질(마음)이 달리 나타나는데 이를 설명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일한 상황하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은 하나 같이 같을 수가 없고, 반응양상이 판이하게 달리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 그것은 각자의 몸과 그것을 구성하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외부환경에 따른 반응 또한 각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보란 생사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識)과 그것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안이비설신의(意)와 말라식(識)까지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것은 몸에 의지해 있고, 몸이 어떠한 상태인가에 따라 그것의 현재적 상태 내지는 진화가 달리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몸과 마음이 시공간에 투출한 까닭은 생물학적 진화와 함께 영적 진화를 위한 일련의 생명활동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공간상에 이미 몸이 있다면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한 신진대사활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영적 정보는 통합정보로 존재하며, 현실적으로는 마음으로 표출되고, 한편으로는 아뢰야식에 장식으로서 갈무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헌데 몸을 가진 존재로서 발현하는 마음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즉 마음은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우리가 언어적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움직임이 없는 무기물 또는 유기물을 물질이라고 한다면 큰 오산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체들 마음의 출발점이된다는 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몸을 유지하기 위해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의 마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 마음의 고향은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곧 음식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몸이 마음이요, 마음이 곧 몸인 까닭이다.

 

아주 손쉬운 예는 관상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학을 하는 이들은 얼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즉 얼굴의 생김새와 기색 등을 살펴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의 됨됨이란 그 사람의 마음 또는 그가 갖고 있는 고유한 정보를 일컫는다. 상학에서는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피고 심지어는 목소리와 걸음걸이까지 자세하게 살펴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외적인 형상, 즉 꼴을 보고 그사람의 내면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우리는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없는 구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정보)이 없으면 몸(에너지)이 없고, 몸이 없으면 마음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 몸을 있게 한 본유종자인 전자기 학습정보(아뢰야식 내지는 사주팔자)가 현재의 음식물에 의해 크게 변화하지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은 세상이 맑아지고 밝아지기를 기원한다. 그러면서도 마구잡이로 동물들을 잡아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양식으로 삼고 있다. 여름철 삼복 중에는 특히나 무수한 닭들이 보양식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다. 으레껏 복날이면 인삼을 넣고 닭을 끓여 먹어야 한다는 관념이 박힌 듯 하다. 물론 그날에만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그렇다. 무수한 가축들이 단백질 공급원으로 사람들의 생활에너지와 살점들로 역할하기 위해 도살돼 가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과도한 육식탓에 이 시대를 사는 이들 대다수는 미룩돼지처럼 살이 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이어트 식품이나 운동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소나 돼지의 살육을 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사회가 밝아지기를 원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바람이요 어불성설이다. 보양식이나 일상의 먹거리로 죽어나간 닭이나 소, 돼지들의 영혼은 또 어찌 할건가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까닭 모르고 죽어가야만 하는 그들의 영혼도 영혼이거니와 그것을 즐긴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죽음 직전에 그들이 사람들에 품었던 원한과 저주가 고스란히 그들의 고깃덩이에 정보의 형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섭취한의 사람들은 어떠할까. 당장에는 어떠한 변화가 닥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것은 뻔한 일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몸이 그러한 정보로 가득히 축적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떻게 전개돼 나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 그 고향은 물질이요,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늘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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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 2015-09-13 06:07:16 0점 댓글 수정 댓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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